두려움 이겨내기와 기 살리기 운동
“저의 주제는 두려움입니다. 그 어떤 두려움 때문에 힘들어하는 이들을 자유롭게 하는 작가가 되고 싶은 것입니다. 저에게도 두려움이 있습니다. 지하실에 있는 것이 두렵고 싫습니다. 어둡고 침침해서 싫고 무엇에 짓눌리는 것 같아 싫습니다. 늙어간다는 두려움, 독자들로부터 받는 평, 좋은 글을 쓰지 못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있는 두려움, 그 두려움 때문에 갖는 고통을 독자와 함께 이겨내고 싶습니다.”
얼마 전 유망 작가 한분의 강연에서 들은 말입니다. 지난 연말에 한국 문단에서 아주 무게가 있는 상을 받는 등 잘나가는 분이라서 요약의 잘못 때문에 누가 될지도 몰라 성함은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한 시간 넘은 강연에서 내게 탁 치듯이 꽂힌 단어가 두려움이었습니다. 지금까지도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으며 어쩌면 상당히 오랫동안 곁에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고 그 때문에 몹시 고통을 받기도 하는 그 두려움 말입니다.
사실 연사에게는 미안하지만 강연 내내 나는 그 “두려움”이라는 단어에 대해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특히 아이를 길러보았고 학생을 가르쳐본 부모요, 교육자로서 살아온 그동안 그 두려움이라는 것을 너무나 가벼이 취급하였구나 하는 생각 때문에 심한 자괴감에 휩싸였습니다. 그랬습니다. 저는 그 강연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두려움? 그거야 극복하면 그뿐이고, 잠시 피하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에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을 보면 이해가 가질 않았고 심지어는 냉소와 무시하는 마음으로 대했었습니다. 벌레를 보면 기겁을 하는 애들, 쥐를 보고 꽥 꽥 소리 지르며 도망가는 여학생들을, 엄살이 심하고 호들갑 잘 떠는 좀 기이한 성격의 소유자로 치부하였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나도 크고 작은 두려움 때문에 벌벌 떨기도 하였고 엉엉 울기도 하였습니다. 유년시절 낮잠을 자다가 깨어 보니 혼자뿐인 것을 알고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에 소리소리 지르며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악몽을 꿀 까봐 두려워했고, 길에서 커다란 개를 만났을 때도 무서워서 한발짝도 내딛지 못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밤늦게 깜깜한 시골 길을 걸을 때에도 그 무엇인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온몸에 소름이 끼쳤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무서움을 달래려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거나 아무말이나 중얼거리기도 했었지요. 군에 있을 때 후임병을 개 패듯이 하던 선임병 때문에, 군사정권 시절에는 보이지 않는 감시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몸조심 많이 했었지요. 미국에 처음 왔을 때 늦은 밤에 돌아오게 되어 혹 괴한을 만나지 않을까 마음 조마조마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상하리만치 난 다른 사람의 두려움에 대해 이해하려 하거나 최소한의 동정을 하는데 인색하였습니다. 애를 키울 때나 학생들을 가르칠 때도 그 무엇인가를 두려워하거나 특정한 두려움 때문에 질겁하는 것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강하게 키우기 위해 공동묘지로 데려가지도 못하면서, 무엇이 그렇게 두려우냐고 핀잔만 준 것 같습니다. 그들의 두려움을 공감하려 하거나 이겨내도록 힘을 보태주지도 못했습니다. 내가 갖는 두려움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그들의 두려움을 이해해주고 어루만져 주고 함께 아파해준다는 생각은 도대체 하질 못했던 것입니다. 강하고 담대한 것이 좋다는 것만 알았지, 누구나 약하고 두려움에 빠져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거나 함께 안타까워하고 이겨내도록 힘을 북돋아 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몰랐던 것이지요.
그것은 참 부모요, 참 교육자의 자세가 아니었다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려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부모가 무엇인가? 교육자는 또 무엇이던가? 마음과 능력과 가치관과 습성이 아직 불안정한 아이들을 보살펴주고 환경을 만들어 줌으로써 튼튼하고 균형 잡힌 성숙한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게 부모요 교육자가 아닌가? 어른의 눈으로 보면 모자라기 짝이 없는 게 아이요, 마음에 들만큼 자라려면 참으로 많은 시간과 도움이 필요한 게 아이가 아닌가? 기대에 못 미치는 게 어린 아이요, 생각이 모자라기에 미성년이라 하는 게 아니던가? 능력 있고 품행이 방정한 학생만을 가르치는 게 교육자가 아니지 않은가? 아무리 말을 해도 못 알아듣고 금방 잘하겠다고 해놓고도 또 잘못을 하는 게 아이요, 학생이질 않은가? 넘어지기도 않고 속상하게 하지도 않는 아이와 학생이 천하에 어디에 있단 말인가? 똑 같은 시간, 똑 같은 활동을 해도 마음과 능력과 가치관과 습성이 똑 같아지지 않는 게 양육이요, 교육의 일상이 아니던가?
그것은 결국 부모로서나 교육자로서 똑똑한 아이, 모범생에 대해 지나치게 집착할 때 나타나기 쉬운 오류가 아닌가 합니다. 성직자들의 자녀들 중에 망나니가 많고, 공부 잘하고 모범생이었던 부모 밑에 말썽꾸러기가 생긴다는 말이 생각이 납니다. 어쩌면 항상 모범생이었던 선생님 밑에서도 비행 학생이 더 많이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살았으니, 당연히 아이들과 학생들도 그렇게 살 것이라는 착각이 아이들과 제자들을 이상하게 바라보게 하여서 말입니다. 모범생만 보아왔고 무엇이든지 착착 잘 하는 학생만 가르쳐 본 부모와 교사의 과거가 오히려 편견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공부를 못하는 아이도 사실은 그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괴로워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숙제를 안 해온 아이도, 시험 문제를 많이 못 푼 아이도, 어쩌면 부모나 교육자가 감지하지 못하는 그 어떤 두려움의 덫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가 특별히 모자라서나 가망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특정 성장 기간 동안 또는 어떤 특별한 경험 때문에 헤어나지 못하는 그 어떤 두려움 또는 심리적 장애 때문에 자기의 본래 가치를 못 발휘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요.
강연을 듣기 전까지 저는 그걸 마음속 깊이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말이나 글로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아이와 학생이 모자라는 것은 당연하다.” “이상한 질문을 많이 하는 학생이 가장 훌륭한 조교이다.” “내가 이해 못하는 남의 생각 때문에 기죽지 말고, 나의 눈과 마음으로 확실하게 이해하는 게 없다는 것을 부끄러워하라.”는 말은 자주 했습니다. “내 강의에 반대되는 내용으로 날 설득하면 A+를 주겠다.” “나의 모자람과 실수는 후회스럽고 부끄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잘만 모으고 관리하면, 귀중한 교훈이요, 남과 이웃의 어려움과 아픔을 치유해주는 약이 될 수 있다.”라고도 했지요. 심지어는 “다른 사람의 어려움과 아픔을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은 참된 부모나 교육자가 되기는 어렵다.”고도 했었습니다. “출세한 제자가 많은 선생님보다, 제자들이 외롭고 힘들 때일수록 생각이 나고 목소리만 들어도 힘이 절로 솟아나게 하는 선생님이 되라.”고도 말했습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그의 뜻과 마음과 삶과 함께 있어주지 못하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 마음과 몸으로 함께 있는 것이 사랑이다.” 가 주례사의 주요 골자이기도 했습니다.
말이나 글이 아니라, 마음과 실천으로, 습관과 매순간의 일상으로 보여주지 못했던 내가 너무나 싫고 미웠습니다. 자기 아이와 자기 학생이 힘들어하고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두려움과 괴로움을 너무나 가벼이 취급하면서 헛소리를 많이 지껄였다 생각하니 기가 막혔습니다. 함께 있어주려 하고 함께 아파하며 함께 싸워주지도 못했던 지난날에 대한 부끄러움이 가슴을 세차게 때렸습니다. 참기 어려운 위선이요, 감당하기 힘든 이중성이며, 야속하기 짝이 없는 껍데기 사랑에 실망하고 우왕좌왕하며 고통스러워했을 아이들과 제자들을 생각하니 정말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 모자람 때문에 행여 단 한사람이라도 상처를 받았고 비뚤게 자랐을지 모른다 싶으니 오금이 저려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쥐구멍에 들어가고 오금이 백번 저린 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다 지나간 일이요,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일인 것을. 자괴감과 죄의식에 빠져 있은 들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후회는 후회로 끝내야지, 회한에 빠져 단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더 나쁜 일이 아니겠습니까? 최소한의 에너지는 살려두어야 하고, 이왕이면 그렇게 깨달은 지금부터라도 더 이상의 실수나 후회가 없는 새출발을 하는게 낫지 않겠습니까? 잘못이 많다고 기 죽어지내고 자책만 하는 것보다는, 무엇 하나라도 고치고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가는 것이 훨씬 낫겠지요? 지금이라도 그나마 남은 작은 기를 불씨처럼 되살리고 이왕이면 활활 타오르게 하여 사람을 살리고 사회를 건강하게 하는 벽돌 하나라도 쌓는 게 그동안의 잘못을 씻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강연은 내게는 어떤 운명의 작용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여생을 “기 살리는 리더십 운동”에 바치겠다는 최근의 결심을 더 굳게 하고 힘차게 할 수 있게 한 귀한 디딤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확신도 없이 새벽부터 새벽까지 문제풀이에 매달려야 하고, 잠재력 극대화와 인격 경쟁이 아니라 학벌 놀음과 점수 경쟁에 매몰되어 있는 우리의 2세들과 교육을 위해 여생을 바칠 길을 환한 불빛처럼 비추어 주어서 말입니다. 자식과 제자와 동료와 친구와 이웃과 국민의 기를 팍팍 꺾는 말과 습성을 과감히 내던지고, 기를 쑥쑥 길러주는 부모와 교육자와 직장 상사와 동료와 이웃과 정치 지도자가 될 것을 호소하고 훈련을 시키는 일, 말입니다. 크건 작건, 개인적인 것이건 사회적인 것이건, 하찮은 것이건 대단한 것이건, 두려움에 사로 잡혀서 자기의 껍질로부터 단 한발자국도 나오지 못하는 이들, 그래서 자기의 귀하고 거대한 가치와 잠재력을 썩히고 있는 수많은 자식들과 제자들과 구성원들과 이웃들과 국민들과 함께 있어 주고 격려하며 희망을 불어 넣어주는 운동도 그중의 하나이지요.
금년은 그 아주 작은 씨앗이라도 뿌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뜻과 땀을 함께 나눌 동지들이 나타나면 그 이상 좋은 일도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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