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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 그간 편안하신 지요. 어머님 계시는 곳에도 해가 뜨고 달이 지고, 비가 오고 바람도 부는지요. 어머님께 글월 올린 지도 벌써 2년이 다 되었습니다. 차일피일 바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을 용서하십시오. 저희들은 어머님이 걱정해주시는 덕분으로 아무 일 없이 잘 지냅니다. 어머님의 모두이셨던 민석이는 벌써 대학생이 되었답니다. 민석이에게 남기신 "몸 건강하고 공부 열심히 해라. 할머니 씀."의 글이 어머님의 마지막 유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글의 원본은 민석이 일기장에 들어 있고, 하나를 복사하여 불효자의 연구실에 붙여놓고 어머님이 보고 싶으면 그 글을 보곤 한답니다. 집에 오면 큰 년 방벽의 어머님 사진을 찾아 뵙습니다. 지금도 어머님은 제 가까이 계십니다. 2년이 지났으나 세상 떠나신 것이 실감이 안 납니다. 석이는 매우 튼튼하고 애비의 전공을 따라 하겠다고 생물학과를 들어 왔습니다. 큰 년은 순흥 안가한테 시집가서 미국에 가 살고 있습니다. 어머님이 계셨으면 무척 귀여워해 줬을 겁니다. 아직은 애가 안 생기고 있어 에미와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귀염둥이 효남이도 튼실 합니다. 에미도 건강한편이나 이제는 밥할 때도, 텔레비젼 볼 때도 안경을 써야 한답니다. 사위를 봤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어제 저녁에도 에미가 해준 닭다리를 먹으면서
"여보, 엄마 생각이 난다."고 하면서 어머니를 그렸답니다.
어머님, 지금도 어머님의 피골이 상접한, 해골과 다름없던 모습이 가끔 생각납니다. 자식도 알아보시지 못하고 멍하게 초점 잃은 눈으로 사방을 휘둘러보시다, 부엌으로 달려가시던 그 모습도 자주 떠오릅니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시니 물도 많이 못 드리고 밥도 조금씩 드렸으니 목도 마르시고 배도 많이 고프셨지요. 누구나 늙으면 그렇게 되는 노망을 요사이는 치매증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알즈하이머 증후군(Alzheimer syndrome)이라고 부른답니다. 세상 떠나시기 전 제가 큰집에 내려가 발톱을 깎아 드렸지요. 그것이 이 불효자와의 마지막 살만짐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어머님, 요새는 주무실 때 눈을 감고 주무시겠지요. 세상 떠나신 후 눈을 아무리 감겨 드려도 감지 않으셨습니다. 평생을 기다렸던 아버지를 못 보고 가자니 눈을 감을 수 없으셨다는 것을 이 자식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해 종일 산 아래 길 자락에서 님 그림자 어리기를 얼마나 기다렸던고. 평생을 학수고대했으나 감감 무소식.
아버지가 일본 놈들의 앞잡이 학도병으로 가시고 두 자식 키우시느라 일본에서 몰래하는'야미 쌀장사'까지 하셨다지요. 2차대전이 끝나고 나라가 해방하니 아들 둘을 데리고 귀국선을 탔고, 그 때 제 나이 겨우 네 살. 아버지 얼굴은 기억 못 해도 그래도 아버지가 자전거를 태워주시던 것과 면회 갔을 때의 모습 같은 몇 가지는 기억을 헤집어보면 약간 떠오른답니다. 미국 비행기가 폭격할 때 물이 출렁거리는 방공호에 들어갔던 기억도 납니다.
어머님, 어머님께서 너무도 두 자식 키우시느라 어렵고 힘드셨지요. 그리고 애비 없는 후레아들 되지 않게 키우기 위해 그렇게 엄하셨고 또 그렇게도 많은 사랑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한과 기다림 그 자체가 어머님이었습니다. 그렇게 기다리는 님을 못 보고 가셨으니 눈을 감으실 수가 있나요. 우리 자식들이 어데를 갔다가 늦게 오면 버스정류장까지 나오셔서 기다리셨던 어머님. 다리에 힘이 없으셨을 때는 대문 앞에서 기다리셨고. 그것이 자식의 기다림이었고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음이라는 것을 이 자식은 압니다. 어머님, 이제는 그 곳에서 아버지를 만나셨으니 주무실 때 눈을 감고 주무십시오. 이 자식이 어머님의 시신에 얼굴을 부비며 한없이 울어보아도 어머님의 눈은 뜬 채로 였습니다. 그렇게 원하시던 아버지와 합장을 해드리지 않았습니까. 아버지가 입대하실 때 두고 가신, 어머님이 그렇게 귀하게 간직해오셨던 아버지의 손발톱과 몇 개 안 되는 머리카락을 합장해드렸지요.
국민학교 몇 학년 땐 지는 기억이 안 납니다만, 점심에 김치국밥을 해주셔서 "엄마, 또 김치 국밥이에요." 했다가 어머님께 크게 꾸중듣고 그 다음부터는 밥투정을 안 했답니다. " 이 놈아, 그것도 못 얻어 묵는 사람이 천지다, 밥투정하면 복 못 받는다." 고 하시면서 느닷없이 귀싸대기 한 대 때리셨지요. 지금도 자주 에미 보고 김치국밥 해달라고 해서 어머님 생각하면서 먹습니다. 부모의 죽음 앞에 불효자가 더 슬피 운다고, 이렇게 어머님이 그리운 것을 보면 오길이도 불효자중의 불효자입니다. 살아 생전에 못 해드린 것도 많아 항상 마음에 끼입니다. 좋은 한약도 해드리고 싶었고, 아버지 세상 떠난 곳 오끼나와도 여행시켜드리고 싶었으나 모두 한(恨)으로 남고 말았습니다.
어머님, 지금이라도 어머님께 용서를 빌 것이 있습니다. 제가 국민학교 졸업 후 중학교를 못 가고 뒷산에 나무할 때입니다. 한겨울 해거름 때 뒷산에서 나무를 하고 있는데, 중학교 교복을 입고 모자를 쓴 친구들이 방학이라고 막차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그 때 사건 말입니다. 교복 입고 모자 쓴 친구들이 왜 그렇게 어린 마음에 부러웠는지 몰랐답니다. 큰돌로 지게를 쾅쾅 때려부숴 버리고 울면서 내려와 "어머이, 나도 학교 보내 주이소."라며 어머니께 달려들었을 때 어머니도 울고 저도 울었지요. 어머니는 저를 와락 끌어안고 저의 얼굴에 얼굴을 부비시고 만지시며 우셨답니다. 학교를 보내지 못하는 남편 없는(그 때도 살아 계실 것으로 믿고 계셨지만) 홀어머님의 깊은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저를 용서하십시오. 이제야 어머님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습니다. 형님 공부 하나 시키기에도 버거워 빚을 내고 하는 판에 동생 놈은 당연히 일을 해야 했던 그 때의 사정을 말입니다. 지금 갔으면 도시로 뛰어나가기나 했겠지만 그 때는 시골에 사람이 훨씬 더 많을 때라 엄두도 못 내었지요. 어머님, 뒷산 꼭대기에 나무하러 올라가 뒤 굽을 세워 동쪽을 보면 진주 남강 백사장이 살짝 보입니다. 형님이 공부하고 계시던 그 진주를 날아가고 싶곤 했답니다. 중학교를 가고 싶은 게 아니라 형님이 보고 싶어서 그랬답니다. 혈육이란 형님밖에 더 있겠습니까. "부부는 의복이고 형제는 수족과 같다."고 했지요.
어머님, 그래도 제가 공부할 운이 있었던 모양이죠. 한 짐 나무를 부려놓고 종고모부님께 인사드렸더니 지금도 생생한 말씀, "와 저런 아를 공부를 안 시키고 지게를 지이오, 내년에 옥종 중학교를 보내이소." 그 소리를 듣고 처음에는 반신반의하였지요. 그 곳에서 자취할 때 어머님은 아픈 발을 절룩거리시며 쌀, 김치 나르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자식이 공부를 하게 되었으니 어머니도 기쁘셨지요. 저의 운명을 바꾸어주셨던 그 종고모부님께 은혜도 못 갚았는데 요절하시고….
"어머이, 내 진주고등학교 시험 한 번 쳐볼래요."라고 많이 졸랐지요. 합격 번호가 119번이었습니다. 고모집, 외갓집을 오가면서 밥은 얻어먹고 외삼촌이 등록금을 주셔서 겨우 겨우 졸업했지요. 저도 선생입니다만 지금 생각하면 선생님들이 미운 일이 있답니다. '교육자'라는 그 분들의 이중성. 시험 때만 되면 납부금(등록금)못 낸 아이들에게 등교 정지를 내립니다. 시외버스 종점에서 외삼촌을 기다려서 기름 때 묻은 돈을 받아내기도 하고, 끝가지 돈을 못 내면 형님 친구 분 최 선생님께 달려가 말씀 드려 시험은 겨우 보고했습니다.
어머님, 저가 대학시험은 거의 포기했었지요. 그러나 외삼촌이 합격하면 소를 팔아주시겠다는 다짐에 용기를 내어 시험을 봤었지요. 외삼촌이 제 대학 졸업식 때 오시고 나서 그만 익사사고가 났었습니다. 이렇게 은혜를 입었던 많은 분들께 작은 보은도 못 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언젠가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네 애비는 공부하다 일본 놈 때문에 죽었다만 너들은 공부 열심히 해서 '애비의 포원'을 갚으라고. 그 말씀을 항상 제 마음속에 간직하여 두고 아무리 어려움이 있어도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이렇게 부모의 말 한마디가 자식의 운명을 결정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어머님, 고맙습니다. 대학교수가 되었다고 그렇게 좋아하시던 어머님의 모습이 엊그제 같이 떠오릅니다. 아버지가 교수가 되신 것이나 다름없다고요.
어머님, "문둥이라도 좋으니 남편이 있어야 한다."고 가끔 말씀하셨지요. 제 주변에도 어머니처럼 혼자서 자식들 키우는 분들을 보면 어머님 그 말씀이 생각납니다. 남편이 없어 보지 못한 사람들은 느끼지 못하는 홀어머니의 서러움과 어려움을 대변하신 말씀입니다.
어머님, 보고 싶습니다. 제기 중학교 때까지 어머니 젖을 만지고 컸 다지요. 아버지께 불효자식 오길이 잘 있다고 전해주십시오. 아버지는 손자, 손녀들, 며느리 얼굴도 잘 모르십니다. 이렇게, 저렇게 생겼고 마음씨는 이렇고 낱낱이 말씀드리십시오. 꿈에라도 자주 다녀가십시오. 며느리는 가끔 시어머니 만난 꿈 얘기를 합니다. 그리고 어머님, 이승에서 못 다한 한을 푸시고 아버지와 행복하게 사십시오. 어머님 은혜 호천망극(昊天罔極) 하나이다.
수욕정이풍부지(樹欲靜而風不止)하고 자욕양이친부대(子欲養而親不待)라, 나무는 가만히 있고 싶으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은 효도를 하고 싶으나 부모가 살아 계시지 않는구나.
1993년 7월
불효자 오길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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